[소설] 여름 이야기

2009. 2. 2. 19:11별 볼일 없는(?) 글

94년인가에 서울대학교 사격회 회지인 '비연'에 썼던 소설입니다. 실화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데 정말 소설이라니까요...



여름 이야기.

그날은 방학도 끝나가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8월말이었다.

잔인했던 여름. 나는 내 가슴속의 한 부분을 묻어버려야 했던, 그 혹독한 더위만큼이나 잔인했던 그 여름을 아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슴이 저린 느낌, 너무나 오랬동안 잊고 있었던 그 감정을 다시 내 가슴에 되살려 준 그녀도 말이다. 아니다. 그녀는 잊어야만 한다. 그러나 어떻게......

사격은 정말 좋은 운동이었다. 총을 잡는 순간만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까만 흑점의 한 가운데에 납탄을 집어넣었을 때의 그 상쾌함은 총을 한번도 잡아보지 못한 문외한이라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나는 권총을 시작했다. 원래 소총을 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뭔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본능이 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리라. 9월초에 있는 서사연 대회(서울지역 대학 아마추어 사격 연합회 사격대회)까지는 한달의 기간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매일 같이 연습을 하고 기록을 냈다. 일주일만에 80%를 넘어서, 곧이어 오백대의 기록을 만들어 냈다. 침울의 늪에서 헤어나 내 모든 것이 상승곡선을 타고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대회날이 가까워왔다. 태릉 국제 사격장에서도 원래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지 적응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회원들의 훈련에 열성적이었던 권희가 그의 훈련조원들을 데리고 태릉에 간다고 하기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바로 그날은 방학도 끝나가는,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8월말이었다.

전날 밤에도 NEXT의 테잎이 두번을 돌고 나서야 간신히 잠에 빠져들 수 있었던 나는 늦잠을 자고 말았다. 게다가 내가 쓸 총을 가지고 가야 했기에 도장에도 들러야 했으므로 약속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늦게 되었다. 그래서 차가 자주 다니지는 않았지만, 최단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 국철을 타게 되었다.

열차가 서빙고역을 지나 한남역을 향해가고 있었다. 아직도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맞은 편의 여학생과 마주쳤다. 잠이 확 달아났다. 화장기 없는 새하얀 얼굴, 그 다지 예쁘게 생기진 않았어도 호감이 가는 생김새에 꼭 다문 입 술은 약간 고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앗, 나의 이상형이 아닌 가? (필자주 : 원래 혼자 오래 살다보면 이상형이 좀 많아진다...) 윤회설이 맞다면 분명히 그녀와 나는 전생의 인연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느낌... 분명히 처음보는 것일텐데도 왠지 전부터 알고 있었던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필자주 : 원래 혼자 오래 살다보면 그런 사람도 자주 만나게 된 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눈과 마주친 그녀의 눈은 무심하게도 다시 읽던 책으로 향했다. 책밑에 깔려 있는 파일이 눈에 들어 왔다. 서울여자대학교 93. 그녀가 가지고 있던 파일로써 알아낸 내가 알고 있는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책장은 잘도 넘어갔다. 역광을 받아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몹시도 고와보였다.

열차가 왕십리역을 지났다. 사람이 거의 없는 열차안에는 규칙적으로 바퀴의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초조했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낡아빠진, 게다가 화이트로 75229라고 촌 스럽게 적어놓은 검은 가방의 자물쇠 부분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괜히 잘 잠기지도 않는 자물쇠를 열어 총을 꺼냈다 넣었다 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든 것은 열차가 덜컹했을 때의 잠시뿐.

열차가 청량리역에 들어선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출발하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되었던 것 같다. 열차가 성북까지 못가고 용산쪽으로 되돌아 간단다. 모두 열차에서 내렸다. 플랫포옴의 투덜거리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나의 눈은 그녀를 찾고 있었다. 아담한 키에 그다지 늘씬한 편도 아닌 그녀는 사람들 틈속에서는 마치 보호색으로 위장된 듯 섞여 들어가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에게만은 예외였겠지만... 나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 보고 있었다. 그녀는 꽤 멀리 그것도 많은 사람들 틈속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로 조금씩 비쳐 보일 뿐이었다. 키도 큰 녀석이 마치 누굴 찾는 것처럼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봐도 우스운 꼴이다. 어쨌든 나는 머리속에 지금 총을 쏘러 가고 있다는 사실도, 이십년이 넘게 쌓아둔 모든 기억들도 증발해버리고 없는 듯, 그렇게 멍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열차가 예정대로 성북역으로 가니 모두들 열차에 속히 승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가 내렸던 그 문으로 다시 탔다. 그리고, 객차 연결 통로 앞에 서서,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가 앉아있었던 바로 앞의 텅빈 자리와 그녀가 타고 있는, 바로 앞칸으로 가는 통로의 문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통로의 문을 열려고 하는 순 간, 문이 열리면서 바로, 그녀가 들어왔다. 부딛칠뻔했다. 내가 멍한 사이에 그녀는 나를 지나쳐 텅빈 객차의 한 구석에 앉았 다. 나도 엉겁결에 앉았는데 그녀가 앉아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좀전까지 앉아있던 자리에 앉아 있는게 아닌가. 눈이 또 마주쳤다. 열차의 흔들림이 멎었다. 우리는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그렇게 서로의 눈을 바라 보았다. 그녀는 무관심 한 듯 읽던 책을 꺼내 들었지만, 글자를 따라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한군데서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딴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녀가 고개를 내릴 때 입가에 떠오른 새침한 미소를 읽을 수 있었다.

열차가 벌써 석계역에 도착했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저만치 앞서 나갔다.

'그래 결심했어. 그녀를 따라가는 거야. 어차피 서울여대 바로 옆이 사격장이쟎아!'

나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는 개찰구를 제일 먼저 통과했으며, 나도 가까스로 바로 뒤에 통과할 수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균형잡힌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고가도로 밑의 버스정류장인 듯한 곳에 멈추어 섰고, 바로 뒤에 내가 섰다. 그리고 전철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내 뒤로 죽 줄을 섰다. 그쪽으로 가는 버스편이 적고, 여대쪽이라서 그런지 모두 여대생들인것 같았다. 남자는 나 하나뿐. 다시 촌스런 검은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나에게 쏟아지는 묘한 눈빛들을 느낄 수 있었다. 태릉 옆 학교 다니면서도 총을 별로 본적이 없는 듯 했다. 이런 것 가지고 신기해 하다니... 나에게로 향한 호기심어린 눈빛들 속에서 나는 그렇게 서 있었다.

잠시후 버스가 왔다. 그제서야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버스에는 커다랗게 '서울여자 대학교'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그 얄미운 버스는 나의 그녀를 태운 채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 화이트로 촌스럽게 75229라고 적어놓은 검은 가방을 든 채 멍하니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볼 뿐......

- The END -

written by L.O.

PS) 위 글은 fiction임을 밝혀둡니다. 전 따라가지 않았거든요.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자리에 산업대학교 셔틀 버스도 서더군요. 그래도 위와 같은 여성을 보시면...... (필자 주: 이제는 사양함. 혼나는 수 있음.)

PS 2) 이 당시엔 군대가기 전의 이휘재가 '인생극장'이라는 것을 유행시키고 있었습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그때 그시절을.

'그래 결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