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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인지라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은 언젠가 맞이하게 될 운명이다. 어제 서거하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남긴 유서에도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는 글귀가 보인다. 어제의 울분을 삭이며 그간 긁적거리던 글을 마무리 한다.

감명 깊게 읽은 책 세 권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 죽음에 관한 책이다. 인간의 풍습은 태어남과 죽음에 대하여 사뭇 다르다. 태어남에 대한 기쁘고 밝은 느낌은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는 반대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두렵고 슬픈 죽음에 대하여 외면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에 소개하는 책 세권은 죽음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표현 방식이 얼마나 직접적인가에 차이가 있을 뿐.


1. 천장(天葬) / 박하선 사진

제목 '천장'이란 새를 통해 영혼을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티베트 고유의 장례의식을 의미한다. 집을 떠나는 의식에서부터 독수리에게 시신을 맡기고, 마지막 수습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담아냈다. 이는 철저하게 외부의 시선이 배제된 과정이기도 하다.
세계적 사진 컨테스트인 월드프레스포토에서 데일리 라이프 스토리스 부문을 수상했다.

- 책 소개 중



죽음 뒤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진집이다. 티베트의 고유 장례 방식인 조장(鳥葬, Sky Burial)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죽음을 맞이한 육신은 독수리가 먹기 쉽게 천장사에 의해 살이 발려지고 뼈가 쪼개진 뒤 독수리의 일용할 양식이 된다. 그리고 독수리의 피와 살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피와 살점이 튀는 현장의 기록이다. 죽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만 풍습에 따라 다를 뿐 결과는 같다.

ⓒ박하선

 



2. 마지막 사진 한 장 / 베아테 라코타 글 / 발터 셸스 사진



독일의 전문 사진작가와 저널리스트가 호스피스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23인의 환자들을 만난 기록을 담은 책. 인생의 마침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풍경을 마지막 사진과 함께 전하며,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유럽 전역에 '웰다잉'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사진전의 모태가 된 책이다.

나란히 암에 걸린 엄마와 아들이 벌이는 힘겨운 투병과 아름다운 작별, 친구의 두려움을 달래주려 매일같이 병원에서 파티를 열어주는 따뜻한 우정, 죽음도 변화로 받아들이며 즐거운 결말을 꿈꾸는 한 워커홀릭의 기다림 등 인생의 마침표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풍경을 전한다.

- 책 소개 중


앞 표지를 보면 눈을 감은 아기가, 뒷 표지에는 눈을 뜨고 있는 아기가 보인다. 그렇다. 죽기 얼마 전의 모습과 죽은 뒤의 모습이다.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아기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책 안에는 이십여 명의 죽기 전의 모습과 죽은 후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죽기 전의 느낌은 다양하지만 죽은 후의 모습은 비슷하다. 하나같이 평화롭다.

 

 

3. 내가 함께 있을게 / 볼프 에를브루흐 글,그림



누구도 이런 식으로 죽음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그림책으로 철학을 이야기하는 작가, 볼프 에를브루흐는 이렇게 아무도 하지 않던, 아니 ‘못했던’ 방식으로 죽음을 말한다. 가리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죽음을 마주보게 하고 죽음과 이야기 나누게 한 것이다.

- 책 소개 중


죽음에 대해 에둘러 말하지만 가장 여운이 오래가는 책이다. 한마디로 충격이었다고 할까. 4~6세 유아용 그림책으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긴 내 책도 초등,중학생용으로 집필한 것이 그림책 판형이다 보니 유아용 도서로 둔갑되어 팔리고 있긴 하다. 원래 출판된 나라에서는 성인용 그림책으로 팔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등장인물은 오리와 죽음이다. 오리는 죽기 전이라 퀭한 자아만 남은 모습이고, 죽음은 해골 바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음은 생긴 것과는 달리 무척이나 수줍고 (마음은) 따뜻하다. 그림을 보면 느낌이 올 것이다.

 

내 아들은 이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도 죽음이란 게 그다지 유쾌한 일이 못 된다는 느낌이 있나 보다. 오히려 아빠가 틈틈이 계속 들쳐본다. 짧은 그림책이니 읽는데 얼마 걸리진 않는다. 하지만 그 여운은 읽는 시간보다 오래 남는다.

그림책의 마지막은 이렇게 맺는다.

죽음은 오랫동안 떠내려가는 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마침내 오리가 보이지 않게 되자 죽음은 조금 슬펐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이었습니다.



ps) 첨부된 사진의 출처는 모두 인터넷 서점 알라딘(www.aladdin.co.kr)입니다.

Posted by 권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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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창민 2012.09.13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이네요

  2. 지성의 전당 2018.08.07 16: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죽음에 대해 관심 있어 하시는 것 같아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 드리려고 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한번 검토 부탁드립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아래는 책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www.uec2018.com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