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의 복제인간을 보며 비정규직을 떠올리다

2009. 6. 30. 00:09별 볼일 없는(?) 글

같은 팀에서 일하던 여직원이 얼마 전에 그만두게 되었다. 비정규직이다 보니 자의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2년이 다되어 해고(계약해지)되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계속되어 익숙해진 풍경이다. 며칠 지나면 옆 팀 여직원도 신참으로 '교체(replace)‘된다.

그 시작을 거슬러 가면 2007년에 만들어진 비정규직 법안이다. 비정규직을 2년 이상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한다는 법이 원래 목적하던 바(?)와는 달리 비정규직을 2년마다 해고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당장 법안이 통과되자 내가 다니는 회사의 2년이 넘은 비정규직 여직원들이 모두 해고되었다. 명색이 4대그룹이라고 형편이 좋아도 예외는 없었었다. 개중에는 꽤 오래 다닌 직원도 있어 화장실에서 울고 눈이 퉁퉁 불어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비자발적인 퇴사다 보니 인수인계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들어올 때 이미 2년 뒤면 끝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눈물 짜고 하는 풍경은 거의 없다. 사실 2년이면 정들기도 좀 어중간한 기간이다.

이번에 그만 두게 된 친구는 워낙에 해맑은 성격이라 크게 내색치는 않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당장 실업급여를 받는다고 해도 또 다른 직장을 2년마다 메뚜기 뛰듯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터.

지나가다 한마디 툭 던진다.
“혹시 그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 본 적 있어요? SF의 저주받은 걸작이라 불리는?”
“아니요. 그런데 왜요?”
“음... 거기 나오는 복제인간들은 수명이 4년이거든. 이번에 법 바뀐다는데 그러면 좀 더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글쎄요...”
 
이 아저씨가 또 뭔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이다.
서설이 길었는데 이제 영화 이야기로 건너뛰자.

* * * * *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작 SF영화로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비해 지나치게 음울한 분위기에다 당시 세계적인 히트를 친 ET와 개봉이 맞물리면서 참담한 흥행실패를 기록했으나, 이후 SF 매니아들에 의해 부활하여 저주받은 걸작으로 회자되는 전설과 같은 작품이다.

1982년 최초 개봉된 오리지널 판 이외에도, 감독의 뜻을 반영하여 결말이 바뀌어 편집된 디렉터스 판(1992년)이 나왔고, 최종적으로 파이널 컷이 2006년에 나왔다. 그만큼  그 해석이 분분하고 끊임없는 관심을 일으키는 화제작이다.

21세기초 타이렐(Tyrell)사는 리플리컨트(Replicant)라고 알려진 사실상 인간과 동일한 복제인간인 넥서스 시리즈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넥서스 6기에 이르러서는 그 힘과 민첩성에 있어선 그들을 창조한 유전공학자들보다 월등했고 지능에 있어선 최소한 그들과 대등했다. 리플리컨트들은 위험한 탐사, 다른 행성들의 식민지화와 같이 격리된 세계에서의 노예로 사용되었다. 어느 넥서스 6기 전투팀이 식민 행성에서 유혈 폭동을 일으킨 뒤부터, 리플리컨트들이 지구에 사는 것은 불법으로 선언되었고, 어길 시에는 사형이었다. 특수경찰대인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이를 어긴 복제인간들을 보는 즉시 사살하란 임무를 하달 받았다. 그것은 처형(execution)이 아니라 폐기(retirement)라고 불리웠다.

(영화 시작할 때 올라오는 자막이다. 이 정도면 안 보신 분들도 분위기 파악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영화는 과학(자본)에 의하여 창조된 수명 4년짜리 복제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감정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인간과 동일하게 만들어졌지만, 기본적으로 인간과 동일하기에 생산된 지 몇 년이 지나면 스스로의 감정반응 - 예를 들면 증오, 사랑, 공포, 질투와 같은 - 이 생기게 되기에 그 수명을 4년으로 제한하였다.

이 복제인간 중 일부(원래 각본에서는 5명인데 제작하다 4명으로 줄었다고 함)가 그들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그 창조주인 과학자(자본가?)를 만나러 지구에 침입하고, 그들을 폐기(retirement)하기 위한 블레이드 러너와의 싸움이 기본 줄거리이다.

영화의 마지막 절정 부분, 건물 꼭대기에 매달린 블레이드 러너(데커드, 해리슨 포드 분)에게 던지는 리플리컨트(로이, 룻거 하우어 분)의 대사.

"Quite an experience to live in fear, isn't it?"
(공포 속에서 사는 느낌이 어때?)

"That's what it is to be a slave."
(그게 바로 노예로 사는 거야.)

그리고 4년의 수명이 다 되어 빗속에서 죽어가는 로이.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로 끝나는 마지막 대사는 SF사상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다.


* * * * *

워낙에 철학적인 SF라 성서에서부터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얽히고설켜 있어 해석이 분분하지만, 요즘 유독 리플리컨트들의 모습이 우리의 비정규직 논란에 겹쳐서 떠오르는 것은 영화 속 배경만큼이나 우울한 우리 시대의 탓일 게다.

노동자가 교체(relpace)가능한 존재라면 복제인간(Replicant)와 무엇이 다를 것이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구호처럼 ‘해고는 살인’이라고 하는데 retirement(폐기)와 execution(처형)이 무엇이 다를 것인지.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하거나 노동조합을 만들 수도 없는 2년짜리 비정규직이라면, 수명이 제한된 복제인간과 또 무엇이 다를지. 항상 짤릴까 실직의 공포 속에 살아야하는 노동자가 노예와 무엇이 다를지. 2년을 4년으로 바꾸건 기간을 유예하건 노예가 노예가 아닐 수 있을지... 답답하기 그지없는 오늘이다.

과학이 발전하면 이 천박한 자본은 정말로 복제인간을 만들어 노동력으로 활용하려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전에 사람을 그렇게 만들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시도되고 있듯이...